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모토 이소로쿠 (문단 편집) === [[제2차 세계 대전]]까지 === [[러일전쟁]] 당시 [[일본 제국 해군]] 소위로 종군하며 [[도고 헤이하치로]] 제독의 지휘 아래 [[쓰시마 해전]]에서 [[러시아]] [[발트함대]]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. 야마모토는 이 전투에서 대포를 조작하던 중 오른손 왼손 손가락 2개를 잃었다. 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다. 1919년에 [[국방무관|미 대사관 무관]]으로 파견되었을 때, [[하버드 대학]]에서 연수하고 유창한 [[영어]]를 익히게 되었다.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[[워싱턴 해군 군축조약]]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다. 이 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[[태평양 전쟁]]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된다. 압도적인 생산 능력, 풍부한 물적/인적 자원, 기술력과 교육 수준 등등 미국의 모든 것은 일본에 비해 말 그대로 [[넘사벽]]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. [[미국]]은 [[제2차 세계 대전]]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프라와 철강 생산량 등 경제적 수준에서 열강들이 수두룩히 모여 있던 [[유럽]]을 압도하였으며 대학의 수와 수준 또한 이미 유럽의 그것을 능가하여 식자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. 그런데 인구도 1억 1천만을 돌파하여 [[러시아]]와 맞먹던 상황이었으니… 더 무서운 건 [[농노]]나 빈민층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와는 다르게, 미국은 이렇게 '''전 국민을 동원 가능한 상황'''이었다는 것이다. 이에 관련된 루머로 [[디트로이트]]의 광활한 공장 지대, 애팔레치아의 [[크고 아름다운]] 광산,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농장, 심지어 야마모토가 몰다 '''퍼져버린 자동차를 지나가던 아줌마가 뚝딱 고쳐내던''' 경험[* 1936년에 만든 [[제너럴 모터스]]의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eJDqm4JOyOs|수동변속기 교육 영상]]이 현대의 교육 매체보다 [[톱니바퀴]]의 원리에 대해 더 직관적이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을 정도로,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반인에게 기본적인 기계공학 지식을 가르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.]에 의해 반대를 한 것이고, 당시 [[일본]]에서는 귀중품이었던 [[설탕]]이 [[미국]]에선 아무나 가져가라는 듯이 노상 카페의 테이블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져있었던 것도 그에게 있어 쇼크였다고라는 이야기가 퍼져 있는데, 적어도 자동차 고치는 아낙네 이야기는 [[쿠리바야시 타다미치]] [[장군]]이 [[대위]]로 육군[[국방무관|무관]]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 한다. 유학시절 방학 때 친구들과 [[멕시코]]에 밀입국해서 유전 지대를 관찰하다 걸린 건 [[흑역사]]라 할 수 있다. 에드윈 팔머 호잇(Edwin P. Hoyt)의 전기에 의하면 멕시코 정부에서 일본 대사관에 조사 의뢰를 맡겼다고 한다. 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했으며, 이 시절 야마모토는 "머리가 굳은 [[거함거포주의]]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항공대가 실적을 올려 보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니, 제군은 더욱 더 훈련과 노력에 매진해야 한다."라고 항공주병론자들을 격려하는 한편, 요코스카 항공대에서 "부잣집 도코노마[* 床の間. 일본식 건축물에서 방의 한 부분을 다른 곳보다 높게 만든 곳. 족자나 수석, 인형 따위로 장식한다.]는 훌륭한 장식품이다. 그 자체로는 실용적인 가치는 낮지만, 그것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로서의 무형적인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. 전함은 실용적인 가치는 하락하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전함 주병 사상이 강해 국제적으로 해군력의 상징으로서의 큰 영향력이 있다. 그러니 여러분은 전함을 도코노마의 인형이다라고 생각하고 전함을 건조하는 것에 대해 너무 반대하지는 마라."라는 훈시를 하기도 했다.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'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[[제로센]]을 1,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', '포격전이 일어나기도 전에 전함은 항공기들의 공격에 격침당할 것이다.' 며 반대하기도 했다.[* 그리고 그 예언은 아주 정확히 이루어져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만든 전함 야마토는 단 한번도 대함전을 치르지 못한 채 항공 어뢰에 두들겨 맞은 끝에 격침당했다.] 하지만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위한 [[점감요격작전]]의 일환이었고, 항모전 자체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.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력 함대를 약화시킨 다음, 일본 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[[러일전쟁]]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[[함대결전사상|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]]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다. 게다가 정작 본인이 항공전에 무지했던지라 일본의 항공기 개발이 산으로 가버렸고, 항공기 운용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탓에 파일럿들에게 '[[우리의 주적은 간부|우리의 적은 우리 장관님이다]]'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. 전후에도 [[사카이 사부로]] 같은 해군 조종사들에게도 대차게 비판받기도. '전함이란 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2척만 있으면 충분하다' 라는 발언이나, 전함 야마토의 건조가 한창이던 구레 해군 공창을 방문했을 때 설계자인 후쿠다 케이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"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다만 자넨 조만간 실직할 거야, 이제 우리 해군도 항공 전력이 중요하지 거함거포같은 건 필요없게 될 거다." 라고 말했고, 여기에 후쿠다는 "불침함은 무리라도, 침몰시키기 어려운 배를 만들겠다." 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. 하지만 막상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'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' 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. (출처 바람) || [[파일:external/livedoor.blogimg.jp/01ff90f6.jpg|width=300]] || || 말년에 국회에 출석하며.[* 사진을 보면 군복이 아닌 정장을 입은 이유가 당시 일본에서는 사시사철 군복 차림을 선호하던 육군과 달리, 해군은 근무 시간 이외 및 외부 출장 등엔 사복 정장 착용을 선호하는 경향이 컸다.] || 그러나 [[그거 먹는 건가요|현실 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]]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[[미국]]과의 전쟁이 승산 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이며,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[[일본 제국 육군|일본 육군]] 강경파와 심하게 대립했다. 이때 하도 암살 위협에 시달려 제독의 집 앞에는 상시 [[일본 제국 육군/헌병|육군 헌병]]들과 [[해군 육전대]]의 [[장갑차]]가 경호를 위해 대기했고, 오죽하면 1939년에 [[연합함대]] 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[[일본군의 육해군 대립|강경파의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]]였다는 얘기가 있다.[* 당시 해군대신은 요나이 미쓰마사로서 이노우에 시게요시 해군성 군무국장과 함께 삼국동맹에 반대해서 셋 다 암살위협에 시달렸다. 결국, 요나이 대신이 야마모토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한게 암살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설은 지금은 정설로 다뤄진다.]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[[전함 나가토]]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오기 어렵다는 얘기다. 그가 당시 총리였던 [[고노에 후미마로]]에게 언급한 '"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. 그러나 그 후에는 [[텍사스]]의 유전과 [[디트로이트]]의 공장들이 (우리에게)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다."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다. 해군군축조약 준수를 주장하고, 나치독일과의 군사 동맹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[[요나이 미쓰마사]], [[이노우에 시게요시]]와 함께 [[해군 좌파 삼인방]]으로 불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